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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모든 마음이 아픔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곳, 모든 마음이 사랑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곳

마음아 놀자 후기


마음아 놀자 깨달음으로 가는 무의식여행

만남 2017-03-11 00:00

잠재의식이 열리며 신비로운 치유가 일어나는 수행소감은,
오로지 자운선가에서만이 공감.공유.소통할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어떤 미운 짓을 하여도 끝까지 단 한번도 버리지 않고
약점으로 비난하지도 아니하고 사랑으로 포용하여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 곳은,
부모님도 자매도 남편도 친구도 아닌 자운선가였으니 말입니다.

다행히도 2014년 한해동안 저는 혜라님의 동영상강의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내면세계와 대치하고 충돌하고 격파하면서 드디어 자운선가에서 수행을 시작한 것이 제 생에 최고로 잘 한 일입니다.
하여 작년의 그 사태에서도 먼가 말 못할 사정이 있겠구나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입지를 그나마 지킬수 있었고
수행전은 고통뿐인 시체이었으니,이혼이냐 죽음이냐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보자 --- 자운선가 수행으로 내 이 한 목숨은 구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혼 역시 제게는 죽음이었으니요.

부모님도 남편도 아이도 그 누구도 내 맘을 이해 못하여 죽어도 눈을 못감을 듯 하였으나,
내 가진 능력으로 이미 매 순간 최선을 다했거늘,
또 저를 이해하는 자운선가가 있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2012년,결혼 3년차 아이가 3살 때,
출산3개월부터 맞벌이하겠노라 큰 소리치던 제가 이 작은 핏덩이를 차마 남의 손에 맡기지 못하고 주부로만 독박육아로 살다보니,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너무 가치없고 초라하였는데,
제 손으로 때릴 곳이 없는 그 아이를 윗집 여자와 똑같이 고함치며 쥐어패는 자신이 너무 가증스럽고 시월드의 사사건건 간섭에 멘붕과 함께 이사를 하였지요.

돈도 없는데 돈도 못 벌면서 매순간 소화되고 소비하는 자신이 한스러워 밥을 두끼로 김치로만 떼우는걸로 줄이면서 모유수유도 강제로 끊어버렸지요.
가소롭게도 고작 공구서랍장 정리로 남편의 인정을 받으려 했던 저는,
“근데 왜?”라며 냉정하게 답변하는 그 말에 철저하게 자존감이 무너져 버렸다.

돈을 벌어야만 자존감을 되찾는 줄 착각하고는,
아이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을 하루 정도 주고는 방문교사를 시작하였는데,
가끔 12시까지 자전거로 주변동네 전단지를 전봇대에 붙이며 미친듯이 일하는 일벌레였지요.
6개월뒤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메일의 사진에는 온통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었네요..가슴이 찢어지지요.
친정부모님과 여동생까지 총동원시키며 도움을 주셨건만 제 맘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그 고마움은 꼬물만치도 기억 안나고 오히려 별로 도와준 것이 없다며 원망하던 저입니다.
기억이 닫혀서 지금도 기억 안납니다.ㅜㅜ


사람들이 즐기는 2012년 그해 여름휴가 제게도 왔습니다.조금 특별하게.

1. 회사관례상 건강검진 중 난생처음 받아본 갑상선 결절이 발견되고 전문병원에서도 양성확진.
그날 네시간을 병원에 머물며 엉엉 울면서 내 몸에 이넘이 왜 생겼는지 검색~

2. 건강검진중 위암전단계 진단받고 약물치료…한달뒤 엄마의 권유로 대학병원에서 재차 내시경,2주간 헬리코박터균 치료받으며 일어설 힘도 없을 만큼 심한 우울증이 생겼음.

3. 아이의 분리불안과 저의 건강악화로 부득이 울면서 퇴사한 저였건만,
회사 팀장의 저를 잘라버렸다는 허위소문을 동료로부터 듣고는,수차례 갑상선암 환자인척 본사로 신고.항의전화.문자하며 처벌은 결국 원치 않는다고 하였네요.
보약을 먹어도 결절이 더 잘 흡수한다는 의사의 말씀에 이듬해 할 수 없이 수술하였는데,수술결과 진짜로 갑상선암이라는 더 큰 충격을 받았죠.

4. 유명 여가수의 가족으로부터 모든 수입을 탕진당한 보도=>공명으로 가족에 대한 원망만 커짐.

5. 저와 아이,남편까지 약 110일동안 그 유명한 대학병원,이비인후과 진료처방에도 앉으나 서나,밤이면 밤마다 거센 기침합창.

6. 중학시절부터 맨날 따라다니던 싸이코 동창과의 부득이한 동창모임에서의 만남 그후 친구도 못만남.

(추)7. 어릴적부터 절친이던 친구의 남편이 간암으로 본래로 돌아감.어린 아이와 꽤 많은 유산을 남긴채.

(추)8. 그 이듬해 20년만에 연락된 고등동창이 "나쁜 남편"과 이혼 한달만에 출근길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됨.(0.000001%의 재생가능도 없다는 병원측 진단)

… …
그해 여름부터 저의 삶속에서 나타나는 사건.사람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몰려와서
끔찍하게도 원망.공포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래,가족이란 존재는 부담일뿐이야,
하나하나 심각하게 따지기 시작하고 모든 것에 남을 원망하며 모든 현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화살을 남에게 발사하느라 결국에는 그 독이 묻은 화살이 제게로 되돌아온 최악의 한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건강 하나만큼은 자신있던 제게,
그때는 그중 하나만으로도 죽을 만큼 흔들리는 힘든 시기였네요.
그 누구의 말도 위로도 들리지 않더군요.

근데 정작 죽으려고 하니 제일 좋아할 넘은,
저 웬수 같은 남편이고 신나게 새파랗게 어린 여자 얻어,
새 장가갈 것이 뻔해서 차마 죽을수 가 없었습니다.
평시에는 얌전한 척,
술만 먹으면 가장 상처되는 말을 하는 저 웬수…
시퍼렇게 눈뜨고 대체 얼마나 잘 살건지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또 죽을 수가 없었네요.
다양하게 죽는 방법 검색에 이어 자살카페도 갸웃거리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찾다가 깨달으면 된다 더군요.

깨달으려면 명상.요가가 뜨길래,
집근처 ㄷㅇㄷ와 동사무소 요가를 다니다가 모두 원망.미움만 떠서 잠깐 다니다 포기하고는,
천근만근 무거운 시체 같은 몸을 끌고 밖에 가는 것보다는 집에서 하는 명상앱을 검색하다 자운선가 힐링앱으로 명상을 듣게 되고 이렇게 자운선가와 인연이 닿게 된 것이네요.

어떡해요,또 긴 글이 될 것 같네요..호호호(간약체로 고침)


수십년동안 스스로 묶여왔던 무의식은
피해자라는 가면을 쓰고는
사랑이랍시고,
세상을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이성을 그리는 착각으로
마음의 외로움에서 사랑의 본성을 되찾아가는 조금 아프지만 따뜻하고 뜻깊은 여행길이였음을.

259기 견성회원 특별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혜라님은 첫마디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여러분은 견성회원이시기에 마음이 말랑말랑하여 감정을 잘 느끼실 것입니다…
솔직히 처음부터 좀 신이 났다.

언제나 계실줄만 알았던 혜라님이 작년 수행때 못뵈서 서운했고 슬펐는데,
이번에 함께 언제나처럼 웃고 박수치면서 노래하노니 감격스러워서 소중한 값진 눈물이 주루룩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다시는 혜라님을 잃지 않으리라`속으로 다짐하였다.

돈관념,열등감,우월감에 대한 강의도 어쩜 그리도 술술 잘 풀이하시는지…
진정한 열등이,우월이에 이어 밉다가 무섭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돈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하시는 “세션의 신”이 되시는 혜라님의 깊은 참사랑앞에서 무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펼쳐지면서 진짜 엄마마음인 참사랑을 가슴 따뜻하게 훅~느낄수 있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부모마음이다.
있는 그대로 포용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

소원들어주기 할때,
앤아이 러빙유님,
아빠의 사랑받고 싶어하는 애기마음을 인지시켜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머니~머니해도 머니가 많으면 좋겠지만,
태아때 경험정보가 역시 가장 뿌리관념 그 자체였다.

저 역시 엄마의 혼전임신 작품이었다.
하여 청소년시기 가슴이 커지는 것 마저 감추려고 꽁꽁 천으로 묶으셨다는 수치심대박인 엄마의 뱃속에서 들킬까봐 쥐죽은듯 숨어지내야만 했었다.
자살과 죽음의 공포는 늘 나를 따라 다녔다.
직장에서도 매 순간 머물지 않고 떠나기 위해 살아온 듯 하다.

10년전,
저는 엄마가 아들못지 않다시며 칭찬할만한 약 30kg의 백팩과 큰 캐리어에 옷가지 대충 몇 벌,엄마의 주문과 함께 친척방문비자로 한국땅에서 3년만 후딱 돈을 벌어서는 중국으로 귀국하려는 계획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넓은 중국땅에서 수십년간 못만났던 가족과 친인척.친구들이 서울땅에서 만나게 되면서
저의 잠재의식은 모두 되살아나 원망과 미움.분노의 불길이 조금씩 치솟았는지도 모릅니다.

초등이나 중졸.고졸하고는 일찍 한국땅에서 돈 벌어 중국에서 큰 아파트 몇채씩을 사놓은 어릴적 친구들,
저는 간신히 엄마의 외벌이로 전문대는 나왔지만,
전혀 행복하지도 못하고 돈도 재물운도 없었다.

가뜩이나 자신의 삶에 대한 가책과 의문이 충만해졌는데,
12년만에 상봉한 부모님의 끝없는 비교와 공격에 저는 더욱 비뚤어져만 갔다.
일부러 알바비용만 벌면서 부모님속을 박박 긁었다.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시는 부모님 얼굴과 다툼에서 나는 무언의 희열을 느꼈다.

제 생에 유일하게 친절하고 자상한 분이 계셨다면
항상 미소 지으며 조곤조곤 말씀하시던 작은 외할아버지이시다.
어릴적,유일하게 한번만 놀러오신 그 할아버지는 잘 때 천장을 바라보면서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는데,
하나는 기억나네요.
시골 산골짜기에서 살아온 제가
“작은 할아버지,바다는 왜 파래요?”
작은 할아버지 와뜰 놀라시며
“어?~^^,그건 말이다.
음~바다가 말이지,
뎅~뎅~~서로 부딪치느라 멍들어서 그렇단다..허허허^^*”
엄마가 옆에서 "작은 아버지는 바다 가봤어요?"
"엉~? 나도 아직 못봤지^^*"
우리 세자매는 꺄르르 웃으면서 잠든듯 하네요..

그뒤로 작은 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작은 외할머니는 90대가 넘은 지금도 쌩쌩하니 살아계신다.
아들 네명에게 이집저집 다니면서 말이다.
그집 넷째 외사촌 오빠에게 저를 비롯한 동생들까지도 저의 “불찰”로 차례로 우리집 한방에서 잘 때 성추행을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아빠가 바로 곁인데 말이죠.

엄마는 초딩의 지난 옛일을 끄집어내어 소문내서 뭐하랴며 게다가 그 오빠(정신장애 있다고 함,어릴땐 몰랐음)는 기억도 안날꺼 오히려 우리만 망신당한다며 난리법석인 우리 세자매를 가라앉혔다.

사실,저 혼자만 당한줄 이튿날 아침 탕탕 소란스럽게 밥상차리면서 아빠께 굉장히 원망하는 눈길을 보냈었지만,아빠는 손님앞에서 제가 버릇없다면서 호된 꾸지람만 하셨다.
그전날부터 엄마는 아파서 큰 도시로 병원 다니셔서 안계셨다.

서울에서 난생 첨 엄마의 소개로 뵐 때,
전 이상하게도 팔자 편하게 시름시름 아프다고만 하면서,
작은 외할아버지를 힘들게 혼자 일하게 하여
일찍 돌아가시게 만든 작은 외할머니가 이유없이 원망스럽고 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분처럼 집에서 육아만 하는 여자는 무능하다 판단하고 극도로 증오스러워졌다.

헌데 수년이 지난 오늘날,
제가 그 모양 그 꼴이 되어 시름시름 아프면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만 하면 아이가 아프고 교통사고 나고,
제 몸도 아프고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은근히 저주받은 예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친정도 시댁도 제가 일을 한다는 소식 들으면 화색을 띄시고
은근히 이것저것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하시곤 하셨다.
너무 싫었다.
비록 실질적으로 친정부모님께 금전적으로 별로 해드린건 없었지만,
장녀인 저만큼은 항상 아들로 간주하신 부모님 덕분에,
단지 심적인 부담감만으로 숨을 쉴수도 없을만큼 힘이 들고 피해의식이 커져 있었다.
하여,저는 돈이 필요하면서도 싫고 두렵고
제게 오더라도 양가에 동생들에게 또 약탈당할 것만 같아서
늘 가난하게 사는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임신때도 얼마전까지도 항상 젤 싼것만 세일하는것만 골라 사먹어왔다.

나는 나의 우주속에서 돈을 회피하며 원치 않으면서도
돈이 없어서 가난하다며 신세한탄을 해온 우스운 꼴인 것이었다.

유정님과 영희님 푸도님의 도움으로 인지조차 못하던 수치심들 청산~너무 고마워요.

“저 인간이 제 인생 다 망쳤어요!”라며 또 피해자 코스프레~
푸도님의 깨우침으로 타임머신 타고 시간여행 가보니,
애초부터 부모사이 이간질시켜서 싸움만들고
돈 안벌어다 주는 장녀는 필요없다며 나가라고 하신 부모님의 성화에,
절친 4명처럼,평생 싱글로 살아갈 남편을 만난지 3번만에 혼전임신으로 시작된 결혼이었으니,
망쳐도 내가 남편 인생을 이용하고 망친 것인데,
왜 임신시켜서 내 인생 망쳤냐며’ 제 원망을 매일같이 듣는 남편은 얼마나 억울할까요?

꿀 먹은 벙어리 된 남편에겐 이런 억지가 따로 없었네요.
오직 결혼하기 위한 여자의 열등하고 분노와 원망+미움투성이에 임신중에 더 예민했던 제가 남편에게 온전한 사랑을 줬을리 만무하겠지요.
이용당한 배신감과 사랑을 못 느낀 남편 역시 제게 사랑을 줄리 없겠지요.
너무 허무하고 넋이 나가는 순간이었어요!

돌부처님 같은 저 웬수를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데,
그동안 우린 서로를 향하여 “사랑 좀 달라”며~애원하고 지독한 외로움에 미움과 원망만을 뿜어왔었네요…

모~든 문제는 남편도 아이도 부모님도 자매들이 아닌 제 탓이었어요.
저의 지독한 관념들이 만들어낸 현실임을 제대로 확인하는 순간들이 에고를 많이많이 빠져나가게 하는군요.

그냥 감사함이 밀려오며 눈물이 치솟았습니다...